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브루스 그로벨라 (문단 편집) === 리버풀 : 붉은 제국의 최전성기와 암흑기를 함께한 레전드 === [[파일:external/static.guim.co.uk/Bruce-Grobbelaar-Liverpoo-008.jpg]] [youtube(NfoIurDhtOI)] 1981년 3월 17일, 리버풀은 25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지불하고 그로벨라를 전격 영입했다. 그는 처음엔 [[레이 클레멘스]]를 받춰줄 서브 골키퍼로 활동했다. 그러다가 1981년 여름, 클레멘스가 [[토트넘 핫스퍼]]로 이적하게 되면서 그로벨라는 주전 골키퍼로 활약할 기회를 부여받았다. 그로벨라는 1981년 8월 28일에 [[울버햄튼 원더러스]]와의 경기에서 리버풀 선수로서 처음으로 데뷔전을 치뤘다. 그러나 경기 결과는 실망스럽게도 1:0 패배였다. 그의 첫번째 클린시트 경기는 그해 9월 5일 아스날과의 경기였다. 이날 리버풀은 2;0 승리를 거두었고 그로벨라는 탁월한 선방 능력을 과시하며 리버풀의 승리를 지켜냈다. 하지만 당시 [[리버풀]] 팬들은 그를 매우 탐탁치 않게 여겼다. 리버풀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로 일컬어지며 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레이 클레멘스의 후계자가 별로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경력도 볼품 없는 남아프리카 태생의 흑인 골키퍼라니[* 하지만 그로벨라는 백인이다] 그럴만도 하다. 몇몇 리버풀 팬들은 그를 향한 인종 차별 발언을 퍼부으며 "당장 내 팀에서 나가!"라고 외쳤다. 특히 1981년 박싱데이에서 맨체스터 시티에게 3:1로 패할 때는 이런 비난이 극심해졌다. 그로벨라의 회고에 따르면, 그는 이 경기를 치른 후 숱한 살해 위협을 받았고 축구 선수를 그만둬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고 한다. 하지만 그는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과 톡톡 튀는 캐릭터성을 발휘해 팬들의 비난을 찬사로 바꾸는데 성공했다. 리버풀의 전설적인 명장 [[밥 페이즐리]]의 지휘 하에, 그는 탁월한 기량을 선보이며 리버풀의 상승세를 이끌었고 급기야 3월 13일 리그컵 결승전에서 토트넘 핫스퍼를 3:1로 제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. 특히 상대팀 골키퍼가 다름아닌 그로벨라 이전 리버풀 골키퍼였던 [[레이 클레멘스]]라서 더욱 뜻깊은 승리였다. [[파일:external/i0.wp.com/Bruce-Grobbelaar.jpg]] 이후 그로벨라는 1981년부터 1994년까지 13년간 627경기를 소화하며 리버풀의 전설적인 [[골키퍼]]로 자리매김했다. 그런 그의 활약상 중 가장 인상적인 순간을 꼽자면 1984년 유로피언 컵 결승전을 들 수 있다. 이날 리버풀은 [[AS 로마]]와 맞붙었다. 정규시간을 1:1로 마감한 양팀은 연장전까지 갔지만 승부를 가리지 못했고 결국 승부차기에서 모든 것이 결판이 날 판이었다. 이후 로마의 두 번째 키커인 [[브루노 콘티]]가 페널티킥을 차게 되었는데, 그로벨라는 이때 기행을 저질렀다. 골대 그물망을 스파게티인 마냥 씹어먹은 것이다. 그런 그의 행위에 심리가 흔들렸는지, 실축을 한 반면 리버풀 선수는 골을 기록하며 리버풀이 1:1로 동점이 되었다. 각 팀의 선수들이 1골씩 더 넣어 2 대 2 동점이 된 상황, 이제 로마의 네번째 선수 [[프란체스코 그라지아니]]가 페널티킥을 차게 되었는데, 그로벨라는 이때 두 번째 기행을 저질렀다. 공을 막기 전 요상한 춤을 추는 것이다. 그의 여러 기행에 그라치아니도 심리가 흔들렸는지, 그라치아니는 실축하고 말았고 리버풀의 다음 키커 [[앨런 케네디]]가 골을 넣어 리버풀은 극적으로 유로피언컵 우승을 달성했다. 아무튼 그는 참 인상적인 선수였다. 실력은 당대 최고 골키퍼 중 하나였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캐릭터성은 화제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. 그는 경기 도중 여러 기행을 저지르는가 하면 우승 세례머니를 할 때 뜬금없이 우산을 가지고 와서 팀동료 및 팬들과 함께 우산을 펼친 채 온갖 익살스러운 사진을 찍기도 했다. 1984-85 시즌 도중에는 한 관중이 경기장에 난입해 공격해오자 단숨에 제압하고는 경찰이 달려와서 그 관중에게 수갑을 채울 때까지 관중을 붙들기도 했다고 한다. 하지만 이런 리버풀에서의 삶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. 1989년 4월 15일 리버풀과 [[노팅엄 포레스트]]와의 FA컵 경기에서 힐스버러 스타디움이 무너지는 바람에 리버풀 팬 96명이 사망한 [[힐스버러 참사]]가 발생할 때, 그는 그 비극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. 이때 그로벨라는 이 사고로 죽을 뻔한 관중들을 많이 구조했고 피해자들의 장례식에 모두 참석해 깊은 애도를 보내 팬들의 아낌없는 박수를 받았다. 그후 심적으로 흔들린 탓인지, 그의 활약상은 예전에 비해 떨어졌고 [[리버풀]] 역시 암흑기를 맞이하고 말았다. 이후 그로벨라는 리버풀이 암흑기에서 헤쳐나오지 못하는 와중에도 꿋꿋이 나와서 팀을 위해 헌신했다. 하지만 갈수록 그의 기량이 떨어지자 리버풀 측은 왓포드 소속의 [[데이비드 제임스]]를 1992년 중반기에 전격 영입했다. 이후 그로벨라는 제임스에게 밀려 세컨 골키퍼 룰을 부여받아야 했다. 그로벨라는 1992-93 시즌에서 6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고 1993년엔 2부리그 소속의 [[스토크 시티]]로 임대되어 4경기를 추가로 출장했다. 그런데 뜻밖에도 [[데이비드 제임스]]가 너무 부진하는 바람에, 리버풀은 다시 그로벨라에게 주전 골키퍼 자리를 맡겼다. [youtube(lFqYv27kHc8)] 1993-94 시즌, 그로벨라는 초반에는 좋은 모습을 보여줘 자신의 기량이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과시했다.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노쇠화된 기량이 드러나고 말았고 팀 성적도 곤두박질쳐졌다. 급기야 1993년 9월 18일 에버튼과의 더비 매치 도중 팀이 2:0으로 패하게 생기자 격노한 나머지 당시 막 데뷔한 팀동료 [[스티브 맥마나만]]과 언쟁을 벌이다가 서로 과격 행위를 해 빈축을 샀다. 결국 그로벨라는 1994년 2월 리즈와의 경기 도중 부상을 당한 뒤 더 이상 경기에 나서지 못했고 시즌이 끝난 뒤 팀을 쓸쓸히 떠나야 했다. 그래도 그는 리버풀에서 14년간 활약하며 6번의 리그 우승, 3번의 FA컵 우승, 3번의 리그컵 우승, 그리고 한 번의 유로피언 컵 우승을 달성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